911 터보S
  • motoya
  • 승인 2013.06.26 00:00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바이사흐(Weissach)란 마을이 있다. 언뜻 보기엔 평범한 시골동네다. 그런데 별난 구석이 있다. 포르쉐가 흔해 빠졌다. 주차장에도, 골목에도 몇 대 걸러 포르쉐다. 포르쉐 연구개발센터가 자리한 고장인 까닭이다. 지난해 가을, 바이사흐를 찾았다. 1963년 데뷔 이후 7세대로 거듭난 신형 911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포르쉐는 신차를 내놓을 때마다 바이사흐로 기자들을 초청한다. 담당 엔지니어 앞세워 기술을 설명하고, 트랙 달리는 시승차에 동승시켜 성능을 엿보게 하기 위해서다. 행사의 타이틀은 ‘911 워크숍’. 낱낱이 해체된 신형 911을 만날 기회였다. 보안은 삼엄했다. 휴대폰과 카메라를 거뒀다. “911 이외에 보고 들은 건 모르쇠로 시치미 뚝 떼겠다”는 서약도 했다.


포르쉐 연구개발센터는 늘 분주히 돌아간다. 포르쉐뿐 아니라 다른 업체의 신차 개발도 돕는 까닭이다. 이른바 외주 엔지니어링인데, 디자인 용역과 더불어 포르쉐의 쏠쏠한 수익원이다. 스포츠카 왕국답게 서스펜션 튜닝이 주특기. 국산차도 포르쉐 고객이었다. 대우 라노스가 대표적이었다. 당시 대우는 “포르쉐가 손본 하체”라며 입에 침이 마르게 자랑했다.

이곳은 경주용으로 쓰는 911 GT3을 최종 조립하는 거점이기도 하다. 강성을 높이기 위해 차 안에 구조물(롤 케이지)을 달기 때문에 슈투트가르트 공장에서 완성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바이사흐의 비밀기지엔 3천여 명의 엔지니어가 몸담고 있다. 폭스바겐과 합병 이후 본격적으로 세를 불리는 중이다. 최근 포르쉐는 “연구원 1천 명을 더 뽑겠다”고 선언했다. 


자욱한 새벽안개 속에서 신형 911과 처음 마주했다. 덩치가 확연히 커졌다. 앞뒤 바퀴 사이의 거리를 100㎜나 늘린 결과다. 몸매는 보다 미끈하게 빚었다. 동글동글 영롱하게 뜬 눈망울은 여전한데 주둥이를 길쭉하게 뽑았다. 공기저항을 줄이기 위해서다. 얼굴도 다소 넓적해졌다. 앞 범퍼는 흡기구를 키우고 위단에 얄따란 LED 주간주행등을 녹여 넣었다.


뒷모습은 전혀 낯설다. 테일램프를 칼날처럼 날카롭게 빚어 더없이 매섭다. 같은 이유로 뒷바퀴를 에워싼 펜더와 범퍼도 훨씬 우람해 보인다. 빵빵한 뒷모습이 자연스레 흉흉한 성능을 떠올리게 한다. 순진한 얼굴과 표독스러운 뒤태의 극적인 반전. 이번 911 디자인의 핵심이다. 그런데 옆모습은 또 거짓말처럼 역대 911과 어긋남 없이 포개진다.


실내는 파나메라 뺨치게 고급스러워졌다. 센터페시아에 깨알같이 집중되었던 스위치를 변속기 주변으로 넉넉히 퍼뜨렸다. 한층 쓰기 편해졌다. 도어의 수납공간도 한층 여유로워졌다. 과거 911은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해야했던 전형적인 스포츠카. 그러나 911은 진화를 거듭할 수록 편안하고 안락한 쿠페에 가까워지고 있다. 소비자가 그걸 원하기 때문이다. 

한편, 근육을 부풀렸지만 체지방은 악착같이 쥐어짰다. 차체무게만 45㎏을 덜었다. 새로 더한 장비를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98㎏을 감량했다. 도어와 보닛, 지붕, 서스펜션은 알루미늄, 실내 내장재의 골격은 마그네슘으로 짜는 등 그램 단위로 살을 뺀 결과다. 동시에 차체강성과 충돌안전성은 높였다. 무게중심도 이전보다 5㎜ 더 낮췄다.



이처럼 포르쉐 911의 진화는 치열하고 절박하다. 소수점 단위의 미시적 개선이 모여 이룬 혁신이다. 팬에겐 동급 최강의 성능, 환경론자에겐 최고의 효율을 제시해야하는 스포츠카의 숙명이다. 코드네임 991의 이번 911도 마찬가지. 911 카레라는 포르쉐 역사상 최초로 배기량을 줄였다. 3.6에서 3.4L로 바뀌었지만 출력은 되레 5마력 높였다. 연비도 개선했다.


911 카레라 S의 배기량은 3.8L 그대로다. 하지만 출력을 15마력 끌어올렸다. 기어이 400마력을 찍었다. 성능은 기대를 성큼 뛰어넘는다. 시속 100㎞ 가속을 4.1초에 끊는다. 최고속도는 시속 300㎞ 이상이다. 반면 유럽기준 연비는 리터 당 11.5㎞에 묶었다. 혈기왕성한 괴물의 식도를 죄기 위해 포르쉐는 가능한 모든 기술을 그러모았다.

가령 변속기는 7단 듀얼클러치(PDK) 방식. 포르쉐가 1983년 그룹 C 레이싱카 956에 얹은 변속기 PDK에 뿌리를 뒀다. 이듬해 포르쉐는 뉘르부르크링에서 열린 수퍼컵 레이스에서 PDK를 얹은 962로 당당히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PDK는 ‘포르쉐 더블 클러치 변속기’를 뜻하는 독일어 ‘Porsche Doppelkupplungsgetriebe’의 이니셜이다.


PDK는 자동변속기의 편리함과 편안함, 수동변속기의 효율성과 경량을 한 데 어울린 주인공. 크기는 1983년형 원조 PDK의 절반 정도. 무게는 팁트로닉 S보다 10㎏이나 가볍다. 구조는 복잡하다. PDK는 원통형으로 포개진 두 개의 입력축 및 습식 클러치, 그리고 한 개의 출력축으로 구성된다. 입력축 두 개는 각각 2, 4, 6단과 후진 및 1, 3, 5, 7단을 맡는다.


홀짝수 기어와 연결된 두 개의 축은 습식 클러치가 전기유압장치로 연결되는 순간 기어를 문다. 1번 입력축이 1단을 물고 회전 중일 때 2번 입력축은 미리 2단 기어를 문 채 클러치 붙기를 기다린다. 상황에 따라 몇 단을 뛰어넘기도 한다. 그러나 늘 홀짝을 오가며 오르내린다. 6단에서 킥 다운할 경우 잽싸게 5단을 물었다가 다시 2단을 거머쥐는 식이다.

PDK의 장점은 셀 수 없이 많다. 우선 기어를 7단까지 쪼개면서 팁트로닉 S 때 2천450rpm였던 시속 100㎞의 엔진회전수를 1천750rpm까지 떨어뜨렸다. 덕분에 연비는 높이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줄이게 됐다. 동시에 변속시간이 최대 60% 빨라졌다. PDK를 처음 단 997 카레라 S의 경우 ‘제로백’이 평소 15%, 스포츠 크로노 플러스 작동 시 19%나 줄었다.


번개 같은 변속은 업시프트뿐 아니라 다운시프트 때도 마찬가지. 킥 다운에 걸리는 시간은 반응과 변속 시간의 두 단계로 나뉜다. 기어를 6단에서 2단으로 낮춘다고 가정하자. 팁트로닉 S는 반응 0.3초, 변속 0.75초로 총 1.05초가 걸렸다. 반면 PDK는 스포츠 크로노 플러스 모드에서 반응 0.02초, 변속 0.4초로 모두 합쳐 0.42초 만에 해치운다.

한편, 이번 신형 911의 PDK엔 가속페달에서 발 뗄 때마다 기어를 중립으로 바꾸는 기능도 더했다. 소위 ‘코스팅(Coasting)’ 기능이다. 그 결과 엔진 브레이크 없이 관성의 힘을 최대한 활용해 달릴 수 있다. 그만큼 다시 가속할 연료를 아낄 수 있다. 멈춰 설 땐 부지런히 시동 끄며 하이브리드 카 흉내마저 낸다. 911 최초로 전동식 파워 스티어링도 달았다.


반나절 숨 가쁘게 이어진 수업을 마치고 야외로 나섰다. 이제 살아 숨쉬는 911을 느낄 차례였다. 바이사흐의 포르쉐 테스트 트랙은 독일 국도의 축소판. 다양한 기울기와 굽이의 코스가 휘몰이 장단처럼 짧은 호흡으로 이어진다. 흡사 롤러코스터의 궤도 같다. 꼭두새벽부터 트랙엔 위장막 뒤집어 쓴 신형 박스터가 꽁무니에 불나게 내빼고 있었다. 


운전대 쥔 엔지니어는 이날 911 카레라 S를 끝장낼 작정인 듯했다. 잔혹하게 내동댕이쳤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911은 심드렁하게 버텼다. 가장 인상 깊은 변화는 굽잇길 성능. 비결은 ‘비대칭 전략’이다. 신형 911은 코너에서 좌우 뒷바퀴의 회전과 서스펜션 강도에 차별을 둔다. 그 결과 반듯한 수평을 유지하며 한층 예리하게 코너를 파고든다.



독일 바이사흐 방문 이후 911을 한국에서 다시 만났다. 이번엔 카브리올레다. 시승차는 911 카레라 S 카브리올레. 파워트레인은 카레라 S와 같다. 그러나 차체 절반 위쪽을 전동식 소프트톱으로 씌웠다. 톱은 스위치만 눌러 13초 만에 열거나 닫을 수 있다. 또한, 시속 50㎞까진 달리면서도 작동할 수 있다. 따라서 신호대기 때 톱 씌우면서 가슴 졸일 필요 없다.

911 카레라 S 카브리올레는 PDK 기준 0→시속 100㎞ 가속을 4.5초에 끊는다. 스포츠 크로노 패키지를 더해 ‘론치 컨트롤’로 가속하면 4.3초까지 단축된다. 쿠페엔 0.2초 뒤진다. 전동식 톱과 차체강성을 보강하느라 무게가 쿠페보다 70㎏ 더 늘어난 탓이다. 물론 이전 모델보단 55㎏ 줄였다. 최고속도는 수동 7단이 시속 301㎞, 자동 7단 PDK가 시속 299㎞다.



이번 911 카브리올레는 쿠페보다 높이가 3㎜ 더 낮다. 길이와 너비, 트레드 등 그 밖의 수치까지 완전히 같다. 뿐만 아니라 등판 곡선을 비롯한 옆모습 실루엣마저 판박이다. 역대 911 카브리올레 가운데 쿠페와 ‘싱크로율’이 가장 높다. 물론 지붕을 열면 쿠페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개방감을 맛볼 수 있다. 가장 기대했던 건 역시 사운드였다. 그런데 의외였다.


골목길 ‘붕붕’거리며 쏘다닐 땐 예상대로였다. 뿌듯할 만큼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고속으로 달릴 땐 거센 바람소리에 섞였다. 미지근하게 희석된다. 게다가 911은 엔진이 꽁무니에 있다. 따라서 사운드가 뒤로 상당부분 흩어졌다. 911의 펑퍼짐한 힙을 바라보며 뒤쫓는 이를 위한 선물인 셈이다. 오히려 사운드는 지붕을 씌웠을 때 한결 생생히 도드라졌다.

‘사운드 심포저’ 덕분이다. 엔진의 흡기 사운드를 얇은 막을 이용해 진동으로 바꿔 실내로 전하는 장치다. 운전자의 흥분을 부추기는 ‘감성’ 아이템이다. 가속 때마다 귓속은 멍멍했고 머릿속은 몽롱했다. 가속페달에서 발 뗄 땐 자갈 볶는 소리가 났다. 포르쉐가 ‘감성’에 주목한 건 물리법칙의 한계와 환경규제로 인해 911의 진화가 점차 완만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쿠페와 성능 차이는 느낌으로 구분이 어렵다. 윗도리 벗겼어도 차체 강성이 워낙 뛰어난 덕분이다. 절대 성능 또한 차고 넘친다. 400마력은 과거 수퍼카의 영역이었다. 신형 911은 고회전에서 숨이 차기는커녕 오히려 가속의 템포를 높였다. 휠베이스를 늘리면서 직진 안정성도 개선되었다. 승차감도 한결 편안하다. 반면 아담한 차체를 요리조리 갖고 노는 재미는 희석되었다. 여전히 정교하고 민첩하지만, 좀 더 크고 아늑한 GT의 성격이 짙어진 탓이다.

물론 911 특유의 감각은 여전하다. 꽁무니에 엔진 얹고 뒷바퀴 굴리는 RR 구성에서 비롯된 특성이다. 가령 긴 오르막 코너에서 가속할 땐 코끝이 슬며시 들뜨는 느낌이 들어 은근히 위축된다. 타이트한 코너에선 곧잘 언더스티어로 흘러 과잉흥분을 자제시킨다. 하지만 그마저도 의도된 스릴. 곧 나올 911 카레라 4와 4S, 911 터보를 위한 ‘전략적 양보’다.

이전 911도 충분히 강력했다. 그러나 신형은 다시 한계를 넘어섰다. 오늘날 포르쉐는 수익 대부분을 카이엔에서 거둔다. 그러나 ‘스포츠카 왕국’의 위상엔 변함이 없다. 포르쉐의 자존심, 911이 존재하는 까닭이다. 강력한 성능과 뛰어난 효율, 차분한 조작감과 강렬한 피드백의 조화. 이처럼 역설과 모순으로 점철돼서, 911의 진화는 늘 세상의 관심을 모은다.

글 김기범 | 사진 최진호, 포르쉐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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